위기의 예술가 시리즈 4
또 하나의 새로운 미술 세계가 열리고 있다?
김노암(아트스페이스 휴 아트디렉터)
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메타버스와 NFT(Non-Fungible Token, 대체 불가능 토큰)에 대한 관심과 투자, 시장이 급속히 확대되며 중요한 의제로 다뤄지고 있다. 항후 문화예술 분야 특히 미술분야의 창작과 감상, 시장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많은 기업들이 NFT와 미술을 연결한 상품을 출시하기 위해 미술인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고, 투자자들은 정부와 함께 NFT협회를 만들고, 미술계의 많은 협회와 조직들이 모여 한국미술저작권 협회를 만들고 있다. 마치 20여년전 밀레니엄을 전후해 IT열풍의 재판을 보는 것 같아 혼란스럽고 어지럽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한편으로는 미술계에 진입하려는 청년미술인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등돌리고 외면한다고 이러한 시대적 풍경이 우리의 현실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엔시 총이란 중국 여성은 지구인으로는 처음으로 사이버 세계인 세컨드라이프에서 가상세계의 부동산을 팔아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녀는 메타버스 세계에서도 경제활동을 통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현실로 다가온 사이버 세계, 메타버스 세계에서, 모든 전지구적 문화예술분야의 신념체계가 그에 맞춰 변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엔시 총처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새로운 것이 세상에 나오면 인식의 과정에 들어오고 그 다음에는 생활의 변화를 낳는다. 그 과정은 시간이 걸리고 또 심리적 장벽도 넘어야 한다. 크던 작던 사건사고도 넘쳐난다. 앞으로 어떻게 우리가 자세를 취하고 대응할지 어는 누구에게서도 정확한 안내를 받을 수 없다. 모두가 불안과 혼란을 겪는 시간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을 어떻게든 지나고 나면 새로이 형성된 질서와 개념의 세계에서 거주하게 되고 균형을 맞추며 마침내 평범한 일상이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 겪게 되는 세대들간의 소통의 어려움 자연적 현상이다. 어려운 과제들이 주어지지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아니다. 우리의 문화와 역사는 문제와 갈등의 생성과 그 해결과 균형을 찾는 과정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메타버스와 NFT는 우리 시대의 변화를 낳는 변곡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금도 많은 청년들이 멋진 비전을 갖고 예술의 길에 들어섰다가 아주 빠르게 이탈하고 있다. 자의든 타의든. 아마도 예술분야에서 반복되는 위기론은 자연현상일지도 모른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모두가 겪게되는 일종의 성장통처럼 우리는 한번쯤 예술의 세계에 깊이 매료되어 그 세계의 주인공이 되는 꿈을 꾸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곧 좌절하거나 실망하거나 또는 흥미를 잃게 되어버리고는 인생을 보다 현실적이고 보다 더 풍요롭게 채워 줄 다른 세계로 이동하게 된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예술 세계에 진입했다 빠져나가는 과정에 위기의 담론은 힘을 받는다. 위기를 극복하거나 위기를 피해 다른 길을 모색하는 합리적인 알리바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미술가들, 미술문화도 마찬가지이다. 위기에 대한 청년미술가들의 문제제기는 필연적인 활동이 된다. 모든 세대는 대동소이한 위기의 담론을 겪으며 성장했다. 그러므로 반복되는 위기(담론)은 그 자체로 일종의 위기에 대한 대응이거나 해소로 볼 수 있다. 위기를 언어화하고 개념화하고 담론의 문제 선상에 구체적으로 올려 놓는 과정이 곧 직면한 위기에 대한 대안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기’는 흥미로운 주제임에 틀림없다. 위기론은 문화예술분야에서도 매우 인기있는 주제이며 유의미한 생산적 담론을 풍부하게 만들어왔다.
예술분야에서 위기는 정말 실재하는가? 예술이 이 사회 전체로부터 섬처럼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예술세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위기들은 실상 예술과 그 밖 세계 사이에서 생기는 차이와 그 차이가 만드는 파열 때문은 아닐까? 위기란 무언가 기존의 질서, 기존의 좋은 것이 불안해지거나 위험에 빠졌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뭔가 상황이 과거에 비해 나빠진다는 인상이다. 백남준이 예술가가 애국하면 망한다는 기이한 조크를 날렸을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정의롭고 도덕적이며 만인에게 좋은 것들에 대해 우리는 그것을 회피하거나 반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기성 사회로부터 그렇게 배웠고 그것을 당연시해왔다. 예술에 있어서 너무나 당연한 의미있는 것, 좋은 것들에 대해 마치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숨시는 공기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생각해보면, 예술에서 위기론이란 무언인지 조금은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예술분야에서 반복해서 힘을 받는 다양한 위기론에 대해 대체로 회의적인 입장이다. 이미 너무도 많은 위기론이 생로병사했다. 그 위기의 실체를 파악하고 극복을 위해 모색하는 과정에 들이는 시간이 충분치 않았을 뿐이다. 우리는 시간에 쫒기기 때문에 위기의 원인을 오랫동안 붙들고 있기 어렵다. 아주 소수의 전문가들 외에 사람들은 생활하는데 시간이 항상 부족하다. 생활과 예술을 하기도 바쁜데 반복해서 몰려오는 위기론에 매번 반응한다는 것은 너무도 소모적이기 때문이다. 예술계에 오래 남은 사람들일수록 위기 또는 위기론에 무감각하고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보편적이게 된다.
메타버스시대의 주역은 10대, 20대들이다. 아쉽게도 나는 너무도 오래전 청년 시기를 보냈다. 그러기에 나는 어떠한 미래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보다 젊고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하고 자신의 비전을 현실화하는데 몰두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청년작가들, 청년 미술인들에게는 비록 불안하고 불편하고 심지어 공포스럽기까지한 위기의 상황에 있더라도 거대하고 새로운 또 다른 미술 세계가 활짝 문을 열고 있다는 현실을 강하게 느낄 것이다. 아주 강하게.